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투쟁의 소중한 성과
故황유미님은 2003년 10월부터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기흥사업장에서 확산 및 식각 공정 노동자로 일했다. 황유미님은 2005년 6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2007년 3월 23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황유미님의 죽음으로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드러났고, 이후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 반올림 등 시민단체는 삼성전자의 사과, 재발방지대책 마련, 산재인정과 보상 등을 외치며 삼성전자와 끈질기게 싸웠다.
지난 14년간 반도체 직업병 투쟁의 결과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삼성전자는 故황유미님 등 반도체 직업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에게 사과하였고, 직업병 지원보상제도를 운영하고, 예방을 위한 노력도 하게 되었다. 그간 반도체 노동자의 업무와 직업병 간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의 산재 신청이 번번이 좌절되었으나, 지난 2017년 대법원은 첨단산업 분야 직업병의 경우 발병원인과의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명확히 입증되지 않더라도 산재를 인정하는 판결을 하여 이전 보다는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이 반도체 노동자의 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한 판결은 증가했고, 대상 사업장과 질병도 늘어났다. 2021년 기준, 현재까지 반올림은 반도체 등 전자산업 노동자 156명의 33여개 질환에 대해 산재보상 신청을 했는데, 이중 노동자 70명의 15개 질환이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인정 판정을 받았다.
유해물질을 다루는 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제도도 개선되었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유해화학물질을 직접 다루는 노동자를 보호하고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작업 전에 노동자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제65조)이 반영되었다. 또한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자료 공개 요구에 은폐로 대응한 삼성전자의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영업비밀을 이유로 물질안전보건자료를 비공개 할 때 고용노동부장관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는 내용(제112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는 화학물질은 기업의 비공개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제112조) 등도 반영되었다.
『화학물질관리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학물질등록평가법)』 에서는 노동자들이 다루는 유해화학물질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도록 ‘화학물질종합정보시스템’을 구축·운영해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 설치현황 등 화학물질의 안전관리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지자체 및 국민에게 제공하는 내용이 반영되었다.
반도체 직업병을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직업병 피해자가 질병의 업무관련성을 입증해야 하는 문제점이 남아있는 등 아직 싸워야 할 과제도 많지만, 그간 반도체 직업병 투쟁을 통해 반도체 산업, 나아가 유해물질을 다루는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보호하는 법·제도가 조금씩 개선되었다는 점은 분명 소중한 성과이다.
반도체 산업 지원을 명목으로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규제 완화 움직임
그런데 최근 정부와 여당이 반도체 산업 지원을 명목으로 추진하는 입법 및 정책 내용에서 그간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투쟁의 소중한 성과를 되돌리려는 우려스러운 움직임이 보인다. 정부는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경쟁이 심해지고 미국 등 주요국의 자국 기업 지원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지난 5월 반도체 산업에 대한 세제지원과 규제완화, 인재양성 지원 등을 내용으로 한 ‘K-반도체 전략’을 발표하였다. 이후 정부와 여당은 반도체 산업 지원 내용을 법문으로 명시해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반도체특별법’(가칭)을 마련 중에 있다고 하였고, 최근 동 법률을 반도체 및 이차전지, 백신 등 첨단산업 종합 육성·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핵심산업전략특별법’(가칭)으로 확대 추진키로 했다.
정부가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현재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입법과 정책 내용에는 유해물질을 다루는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는 법·제도 완화가 포함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반도체 업계는 중대재해처벌법, 화학물질관리법, 화학물질등록평가법, 산업안전보건법 등의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업계는 관련 법 제·개정 당시부터 반대 의사를 강하게 표출했다. 유해물질 관리를 강화하는 동 법률로 인해 기업의 기밀 정보까지 공개될 수 있다며 동 법률을 ‘한국 산업경쟁력을 갉아먹는 입법’이라 비하하기도 하였다.
여당 반도체기술특별위원회 관계자는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 과도하게 규제되는 부분은 없는지 들여다 볼 계획”이라며 업계 요구에 긍정적으로 화답하였다. 야당 반도체특위 위원장도 “이 법들 가운데 산업경쟁력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과도한 규제가 있는지 여부를 살펴볼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툭하면 으르렁대던 여야가 노동자의 건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반도체 업계의 규제 완화 요구에는 사이좋게 화답하는 형국이다.
노동자의 안전보다 ‘산업경쟁력’ 강화를 더욱 중요시 하는 정부
2019년 정부와 여당은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을 개정하며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기술의 유출방지 및 부정한 유출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반영하였다. ‘국가핵심기술’에는 반도체, 자동차, 철강, 원자력 등 12개 산업의 62가지 기술이 포함된다. 문제는 개정된 이 법이 담고 있는 ‘국가핵심기술의 정보 비공개’ 조항을 유해물질을 다루는 기업이 작업환경 문제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 따르면, 여전히 직업병 피해자가 질병의 업무관련성을 입증해야 한다. 직업병 피해자는 사업장과 병원을 찾아다니며 산재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구해야만 한다. 피해를 입증할 핵심 자료는 노동자가 어떤 유해물질에 얼마나 노출됐는지 보여주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다. 그러나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으로 직업병 피해 노동자가 이 정보를 얻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사업자에게 자료제출을 강제할 수 없을뿐더러, 『산업기술보호법』의 ‘국가핵심기술의 정보 비공개’ 조항에 따르면 사업자는 국가핵심기술, 예를 들어 반도체 관련 10개 핵심기술과 관련한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비공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기술보호법』 개정 당시 반올림 등이 이를 ‘삼성보호법’ 혹은 ‘반올림방지법’으로 불렀던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와 여당의 『산업기술보호법』 개정 내용은 유해화학물질을 직접 다루는 노동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이 담긴 『산업안전보건법』의 취지와도 모순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물질안전보건자료의 비공개에 제한을 두고 있지만, 오히려 『산업기술보호법』은 ‘국가핵심기술’이란 명목으로 작업환경 관련 정보를 비공개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재용 부회장 사면보다 노동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구체적인 안전관리 책임이 민간에 있거나 사회적 논의나 입법이 지체되는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안전에 대한 궁극의 책임은 정부가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 재난에서부터 생활 속의 안전까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더욱 자세를 가다듬고 다부지게 대응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 논의되는 교통안전 법안이나 산업안전보건법, 발전산업안전강화방안 모두 희생자와 유가족의 눈물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19년 12월 17일, 문재인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 中)
정부는 ‘안전에 대한 궁극의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 관련 최근 규제 완화 움직임은 정부가 노동자들의 안전 보다 ‘산업경쟁력’ 강화를 더 중시하고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반도체 직업병 및 가습기살균제 희생자와 유가족의 눈물’에 빚져 화학물질관리법, 화학물질등록평가법, 산업안전보건법 등이 제정되거나 개정되었고, 여전히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노동자 사망사고가 지속되는 현실에서, 해당 법률은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담보하고 산재를 예방하기 위해 기업이 마땅히 해야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산업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기업 요구에 따라 이들 법률을 쉽게 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하지만 최근 정부와 여당의 움직임은 매우 우려된다. 업계는 반도체 산업 위기를 반도체 산업 규제 완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국정농단사건으로 수감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 근거로도 활용하고 있다. 여당 대표는 업계의 이재용 부회장 사면 요구에 대해 “이 부회장을 풀어서 활동하게 해달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높아진 건 사실”이라며 “사면이 아니라 가석방 등이 있을 수도 있다”고 화답했다. 대통령도 “국민들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경제가 코로나19 위기 등 다른 국면에 놓인 상황에서 기업의 대담한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고 답변했다. 정부와 여당이 반도체 산업 위기라는 허울 좋은 명분에 휘둘려 반도체 산업 규제 완화와 이재용 부회장 사면·가석방 등 업계의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다.
“애초 정부의 산업재해 보상을 받기가 그토록 어렵지 않았다면 우리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근로복지공단은 많은 산재노동자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제는 산재보험제도와 근로복지공단을 개혁해서 산재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산재가 발생한 사업장에서는 사업주의 잘못을 철저히 조사해서 형사처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직업병 보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방입니다. 노동자가 무슨 화학물질을 쓰는지 알 수 있게 노동자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알 권리, 참여할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강화해야 합니다” (2018년 11월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반올림 대표인 故황유미님 아버지 황상기님의 인사말 中)
반도체 직업병 투쟁으로 유해물질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법·제도의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산업재해 인정과 보상, 산재 사업주 처벌, 산업재해 예방 등과 관련해서 법·제도의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노동자 사망사고가 지속되는 현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더욱 자세를 가다듬고 다부지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노동자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더욱 몰두해야 한다. 노동자가 건강해야 기업도 발전하고 산업경쟁력도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2021년 7월 20일
공공을위한과학기술인포럼(FO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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